January 26 Praying with Tears
Who, in the days of His flesh, when He had offered up prayers and supplications, with vehement cries and tears to Him who was able to save Him from death, and was heard because of His godly fear. Hebrews 5: 7
기도를 “왜 해야 하나”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어차피 기도해도 들어주지도 않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내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믿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어렵고 힘들고 그 아무에게도 손 내밀기 어려운 때였다. 위로가 되는 말씀도 없었고 누구에게 의지 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다.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은 삶에 대해 왜 내가 신앙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였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믿음이고 신앙인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때는 어떤 종교적 행위도 도움이 되지 않는 때였다. 그 때는 이미 경험할 모든 것을 경험한 후라고 생각했던 때였다. 하나님에 대해 경험하고 알고 그분이 허락하신 모든 것에 감사도 할 줄 알던 때였지만. 그 모든 상황이 마치 욥과 같은 그런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는지 시련이 왔던 때였다. 나이가 들고 딛고 섰던 땅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 같은, 그래서 더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자신도 없던 때였다. 정말 갑자기 그렇게 인생이 무너지는 때였다. 그 때 할 수 있는 일은 일상을 겨우 유지하는 일이었다. 밥을 제시간에 먹고 운동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외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때였다. 그렇게 일 년을 보내고 나서 점점 회복하기까지 꽤 몇 년이 걸렸다. 그리고 그 때 깨달았다. 내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을. 나의 모든 상황과 환경이 믿음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그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밖에 없음을, 철저하게 깨달았던 때였다. 내가 약하고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달았을 때 그때가 사실은 내 믿음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결국 내가 다시 살 수 있는 환경과 그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그 한계를 맛보고서야 겨우 다시 그 믿음으로 설 수 있었다. 욥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에게는 그런 시련이었고 고난이었다. 예배와 말씀이 나를 위로하지 못할 때, 그 때가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든 때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일상을 영유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믿음을 가지고 일상을 산다는 것의 고귀함을 깨닫게 된 시간들이었다. 다시 그런 시간들은 겪고 싶지 않다. 그러나 잊어버릴 때쯤, 혹 내가 다시 교만해져서 내가 마치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니까. 그리하여 당신의 자녀가 어려움에 빠지고 그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잘못된 신념, 혹 자가당착에 빠져 진리를 벗어날 때 분명 다시 그런 일이 내게 허락될 수 도 있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상황에 있고 싶지 않다. 내가 피하고 싶다고 피해질지는 모르지만. 신체는 점점 더 약해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어지고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질 수 있는 상황이 어쩌면 차라리 더 나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날들로 이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분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살게 되는 지금에 감사하는 하루이기를 빌어본다.